DAY 1

Sep 18 2018

인천국제공항

대한민국KR

취리히 공항

스위스CH
물과 천사

서른이 되면, 이유없이 아픈 때가 많아진다. 더 이상 어릴 때처럼은 영원을 믿지 않는다. 내가 떠나거나, 나를 떠나는 일들이 무수해진다. 그런 밤은 잘 데운 커피와 우유를 마셔도 앓기 마련이다.

여름을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보냈다. 유난히 뜨거운 날들이었다. 가을이 되자, 앓고 난 자리에서 물음이 생겼다. 오늘을 어떻게 하면 사랑스럽게 만들까? 문득 ‘천사의 도시’라는 이름의 ‘엥겔베르크’에 다녀온 기억이 났다. 그곳에서 내가 한 일이라곤, 새파란 호수를 자전거로 돌다가 산책하는 할머니와 커다란 강아지에게 안녕? 손 흔드는 게 전부였다. 행복했다. 어쩌면 천사는 물에서 태어날지도 모르고, 사람은 대부분 물로 이루어져 있으니. 낙엽이 마르는 가을의 나는 그 물빛이 필요했다.

DAY 2

Sep 19 2018

취리히

스위스CH

루체른

스위스CH

필라투스 산

스위스CH

카펠교

스위스CH

스위스 입국은 별다른 서류가 필요하지 않았다. 여권에 도장을 찍어주는 공항 직원은 단풍처럼 붉은 곱슬머리의 중년 여성이었다. 그녀는 내 여권을 보더니 “앙뇽하세요?”하고 말을 걸었다. 미소가 푸근하고 달큰했다.

스위스패스는 미리 한국에서 구매했다. 수기로 여권번호와 이름만 적으면 바로 사용할 수 있었다. 루체른으로 출발했다. 여정은 단순했다. 도시의 경계를 지나자마자 강과 호수가 보였다. 이곳의 물은 거울을 비단처럼 엷게 짜 흔드는 것만 같다. 산과 하늘의 빛깔을 그대로 투영한 채 끊임없이, 은은하게 흐른다.

숙소에 짐을 맡긴 후, 천천히 주변을 걸었다. 나의 숙소는 카펠 교와 멀지 않은 골목에 있었는데, 조금만 걸으면 녹색 벤치들이 늘어선 호수에 도착했다. 초콜렛 가루가 뿌려진 카푸치노와 크로와상을 샀다. 구름같은 깃의 백조들과 새하얀 보트, 고동색 나무 선착장이 마주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숨을 쉬었다. 작은 섬의 기분을 느꼈다.

오리 두 마리가 조각배처럼 떠다녔다. 꽁무니에 별의 쌀알 같은 것들을 붙이고서. 대각선에는 빨간 꽃들이 구슬처럼 둥글게 장식되어 있었다. 관광객들이 지나가다 까르르 웃으면서 사진을 찍고 갔다. 여기에서는 한낮의 물결을 마음껏 감상할 수 있다. 낮과 물이 만나면 황금이 날개짓하는 순간이 쏟아진다. 화창한 날의 스위스를 다녀 온 사람들은 이해하는 말.

체크인까지는 시간이 남아, 무작정 선착장으로 갔다. 마침 필라투스 행 유람선이 와 있었다. 스위스패스를 보여주고 들어갔다. 배는 부드럽게 출항했다. 산이 물 위에 그림자를 만들 때, 경계선은 독특한 광채를 뿌린다. 유난히 희고 아련하다. 내가 클로드 모네같은 화가였다면 분명 이 사이의 빛깔을 그리고 싶었을거다. 옆자리의 할머니는 보라색 바탕에 무지개가 깔린 실로 내내 목도리를 뜨며 가셨다.

사람들을 따라 산악기차를 탔다. 45도 정도 되는 경사를 장난감 같이 생긴 기차로 얼마간 오르자 전망대에 도착했다. 상쾌한 풍경이 펼쳐졌다. 머리 위로는 새들이 날아다녔다. 우연히 만난 풍경일수록 기쁨은 배가 되는 법. 스위스 여행 첫 날을 장식하는 풍경으로 더할 나위 없었다.

내려올 땐 케이블카를 탔다. 숲 속을 지날 땐 동승자들이 다 같이 숨을 죽였다. 따뜻한 침묵, 평화로운 죽음같은 고요가 흘렀다. 선착장이 아닌 다른 곳으로 내려온 바람에 모르는 길이었다. 일단 다른 이들을 따라 걸었다. 스위스 사람들은 팔다리가 길고 몸이 통나무처럼 네모나서, 어쩐지 겅중겅중 걷는 사람들이 많다. 눈치껏 루체른 역까지 가는 버스를 잡아 돌아왔다.

저녁은 아무 음식점이나 들어가 연어 랩 샌드위치와 체리 리큐르가 든 디저트를 먹었다. 맛이 썩 좋지는 않았지만 기분 좋게 노곤했다. 광장 모서리에서 흑인 트럼펫 연주자가 공연을 했다. 다섯살 쯤 되어 보이는 아이가 그에게 다가가 말을 걸고 손을 흔들었다. 그 장면을 한동안 바라보는 일로 하루를 마무리했다.

DAY 3

Sep 20 2018

루체른

스위스CH

몽트뢰

스위스CH

시옹 성

스위스CH

Queen Studio Experience

스위스CH

프레디 머큐리 동상

스위스CH
Made in heaven

몽트뢰에 왔다. 반짝이는 커다란 물을 가운데에 둔 호반도시의 첫인상은 ‘미치도록 예쁨’. 물이 하늘이고 하늘이 물인듯. 구름을 머금은 산이 둘러진 은색의 호수와, 앙증맞은 가게들 사이를 노인들이 천천히 걸어다니는 곳이다. 숙소 리셉션 직원은 붙임성 좋은 얼굴로 자신이 기르는 털복숭이 강아지, 예티를 소개했다. 어서 화사한 산책을 시작하고 싶어, 그가 건넨 지도를 들고 바로 출발했다.

먼저 시옹 성에 들렀다. 아기자기한 중세의 성이었다. 몽트뢰는 호수를 따라 걷기만 하면 대부분의 주요 관광지를 다 섭렵할 정도로 자그마한 곳이다. 그래서 어여쁘다. 시옹 성엔 한글판 리플렛도 있었다. 여기에 적힌 번호들을 따라다니면 성의 내부를 탐험할 수 있다. 건물의 구조보다도, 고성에서 내려다보는 레만호의 풍경이 아름답다.

I was born to love you

몽트뢰를 방문해야겠다고 결심한 이유 중 하나는 퀸의 보컬 프레디 머큐리가 여생을 보낸 곳이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사랑에 충실했고, 사랑을 치열하게 노래했으며, 나는 나 자신이라고 말함으로서 전설이 된 이가 있었을까. 그는 이곳에서 마지막으로 인생이 어떻든 “이 쇼는 계속되어야 한다.” (< Show must go on >)는 곡을 발표했다. 여행기를 적는 지금은 11월 20일. 앞으로 4일 후면 그의 기일이다. 그의 사후에는 < Made in heaven >이란 타이틀로 스완송을 담은 앨범이 나왔다. 수록곡에서 그는 “나는 당신을 사랑하기 위하여 태어났다.” (< I was born to love you >)라고 고백한다.

그는 천국에서 곡을 만들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퀸 박물관은 카지노 안의 열 평짜리 공간이었다. 몇 분이면 다 돌아볼만큼 작은 규모지만 성급히 나가고 싶지 않았다. 퀸의 기록들을 돌아보며, < Bohemian Rhapsody>에서 소년의 외침들은 자신의 어느 부분을 죽이며 살아가야 했던 그 내면의 몸부림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유리 안에 생의 말미에서 그가 작사한 <A winter’s tale>의 가사가 보관되어 있었다. 백조가 떠다니고, 어른들의 곁에서 아이들이 탄성을 지르는, 마법같은 겨울 공기 속 당신의 손에 쥐인 세계의 소망을 생각하던. 생의 끝자락에서 그가 묻는다.

“내가 꿈을 꾸고 있나요(Am I dreaming)?”

일몰이 보일 때까지 걸었다. 그와 같은 이름이 붙여진 행성은 물의 별(水星)이기도 했다. 아침부터 밤까지 물의 곁을 거닐었다. 인간의 대부분이 물로 이루어졌음이 문득 멋졌다. 우리를 탄생시키고 조용히 잡아먹기도 하는, 물. 우리가 부질없이 소멸해도 물이리라는 예감. 특히 생의 처음엔 누구나 가졌다가, 잃을 때도 있고, 그립기도 한 눈물을 생각한다. 오랜 시간 동안 물은 노래할거고, 울 것이니까. 흐르는 삶은 괜찮다. 우리가 아직 울 수만 있다면.

DAY 4

Sep 21 2018

몽트뢰

스위스CH

체르마트

스위스CH
아름다운 목적

빨간 초콜릿 케이스 같은 바탕에 흰 줄무늬가 있는 기차를 타고, 체르마트로 이동했다. 유달리 사람이 적은 기차였다. 덜컹거리는 소리 외에는 조용했다. 녹색이 섞인 황금빛 콧수염에 군복을 입은 남자가 꾸벅꾸벅 졸면서 간다. 자신의 몸만한 가방을 힘겹게 들고 탄 동양인 소녀 둘이 사진 찍기에 몰두한다. 연세 지긋한 할아버지 둘이 도란도란 떠드는 소리만이 동행한다.

산을 구불구불 넘는 스위스의 기차. 알록달록한 페인트 칠을 한 창가에 붉고 동그란 꽃 화분을 장식한 집들이 스쳤다. 체르마트로 가는 길의 강물은, 천사가 옷깃을 늘어트리고 달린 흔적같다. 우유에 소다를 탄 것 같은 색이다. 이윽고 커다란 돌산이 펼쳐졌다. 천장까지 정사각형으로 뻗은 창문에 기대었다. 산에 파묻히는 느낌이다.

스위스에선 기차를 오래도록 타고 싶었다. 가만히 있어도 되는 시간이 좋았다.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어딘가에는 도착해 있을 텐데, 아무렴 어때. 싶었다. 어차피 모든 삶은 종착지가 똑같으니, 더더욱 아무렴 어때.

내 안에서 큰 존재였던 것들이 한낱 부스러기가 되는 순간이 있다. 그럴 때면 나는 당황하다가, 슬프고 화가 나다가, 그걸 티끌이라도 모아 간직하고 싶다. 공깃돌로라도 만들어 손에 쥐고 한참 바라보고 싶다. 그러나 한 번 바스라진 것들은 어디로든 흘러가기 마련이다. 나는 이제 그 사이의, 무엇도 없던 시절을 응시하고 통과해야 하는구나. 기차를 타는 건, 세상에 파묻히되 흘러가는 연습이다.

체르마트는 아담하고 다정한 골목들이 있는 곳이었다. 모닥불을 피우고 둘러 앉아 옛날 옛적엔, 으로 시작하는 이야기를 해야 할 것만 같다. 캐러멜 박스를 닮은 전기차들이 느리게 돌아다니고, 참새들이 그릇 아래 떨어진 빵 부스러기들을 주워먹으려 종종댄다. 나무 향이 나는 숙소도 호텔이라기보단 소박한 다락방 같았다. 은은한 오렌지 빛 가구들에 둘러싸여 있자니, 하이디와 야생화에 대한 글을 몇 편쯤 쓸 수 있을 것 같다. 맥주 한 잔을 마시고 노곤하여 일찍 잠에 들었다.

DAY 5

Sep 22 2018

체르마트

스위스CH

마터호른 산

world

마테호른을 보기 위해 이른 시간 집을 나섰다. 점심으로 먹을 밀빵 샌드위치와 커피를 사서 나오는데, 점원이 빙긋 웃으며 사과를 공짜로 선물했다.

하지만 어제는 맑던 날씨가 온통 흐렸다. 이게 산악 마을의 기후라는 건가. 걱정을 안고 기차를 탔다. 오르는 내내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안개투성이. 실망스러웠다. 쌀쌀하고, 어둡고, 으스스했다. 고작 몇 시간만에 내가 알던 세상이 바뀌었다. 나는 그대로인데, 세상은 나와는 관계없이 제멋대로 얼굴을 바꾸었다. 혼란하고, 두려웠다. 내가 바라마지않는 것들을 나는 잃을지, 얻을지 알 수 없었다. 그건 누구도 답을 대신 말할 수 없다. 자연조차 정해놓지 않았다.

다만 나는 마음을 다독였다. 이 순간을 어떤 빛깔로 만들지만이 유일하게 선택할 수 있는 일이었다. 소설가나, 동화작가들의 순간을 빌려오기로 했다. 만약, 낮에는 장난감 동산처럼 귀엽다가 밤에는 음산한 심혼들이 깨어나는 마을의 이야기를 쓴다면. 지금 이 길을 배경으로 하자. 이슬을 머금은 방에서 잠들었다가, 모험을 떠나기로 결정한 소녀의 이야기를 빚으면 지금의 안개도 꽤 멋진 소재겠네. 라는 식으로 여행을 지켰다. 어느 순간, 웃음도 나왔다. 가방 속의 사과 한 톨을 기억했다. 그래도 내게는 누군가가 선물한 예쁜 사과가 있어. 마지막으로, 꼭대기에 도착하자....

탄성이 절로 터졌다. 구름은 온데간데 없이, 쾌청한 하늘이 가득했다. 마테호른 봉우리가 기다렸다는 듯이 우뚝 서 있었다. 천상에서 갓 내려 온 것처럼 청명하고 당당한 미소로.

많이 들떴다. 눈 앞에 펼쳐진 파랑과 백색의 조화.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안개 속에서, 유지하려고 애썼던 선량한 관점. 그 끄트머리에 드러난, 선명한 아름다움. 이 순간만큼은 모든 게 하나의 계시처럼 느껴져서 나는 머리끝까지 들떴다. 오늘만큼은 풍경을 존재 전체로 만끽하고 싶었다. 보통은 다시 열차로 내려온다는 거리를 쭉 발로 딛으며 갔다.

리펠제 호수를 넘어서까지 하이킹을 했다. 밥은 꼭 마테호른 봉우리가 마주보이는 장소에서 먹고 싶었다. 다들 열차를 타러 갈 때 욕심을 내서 걸었다. 널찍한 바위 하나를 찾아 앉았다. 정면의 찬란한 풍경 속에서 맛있는 점심을 먹는 기분이란! 사람이 이러려고 월급을 버는거구나, 깨달았다. 나는 도시보다 자연이 좋고, 정신없는 쇼핑몰보다 다채로운 야생이 좋다. 내 속도에 맞는 장소에 도착하면, 저절로 기쁨이 발현된다. 기분과 감정이란 것도 자연 같아서 변덕스럽다. 나의 미약함에 슬프고 우울하다가도 햇살이 비치는 사랑스런 바위, 조용하지만 솔직하고 당찬 바람, 신의 눈물 같은 공기들을 마시면 기쁨이란 게 올라온다. 기쁨은 우물에서 천천히 긷어올리는 보석같다.

아름다움은 기쁨을 남긴다. 그건 결코 견고하지도, 영원하지도 않다. 가장 부질없고 쓸모없다. 그게 세계와 인간의 속성을 드러내어, 가치롭다. 아름다움은 결코 선하지만도 않다. 황홀한 취기나 마취제에 가깝다. 하지만 누구나 아름다움을 원한다. 자신이 찰나라도 아름다운 적 있었기를 바란다. 그래서 더욱 비극적이다. 나는 우리가 아름다움을 찾아 여행을 떠나는 이유가, 무의미함 속에서 연대하고 싶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대상이 자연이든, 사랑이든, 나 자신이든간에 손을 맞잡는 것.

아름다움에 목적이 있다면, 어쩌면.

DAY 6

Sep 23 2018

체르마트

스위스CH

Sunnegga

스위스CH

한 곳에서 오래 머무는 여행을 좋아한다. 그러나 한국의 직장인이 된 후론 느긋한 여행은 사치가 되었다. 많아야 5~7일이 전부인 휴가로는 하나라도 더 봐야 할 것 같아 마음이 조급하다. 더욱이 비행기표와 물가가 비싼 유럽의 경우, 한 달 월급을 고스란히 탕진하기로 결심해야 한다. 본전 생각이 들기 마련이고, 쉬러 왔으면서 일정을 바쁘게 잡는 사태가 벌어진다. 그럼에도 체르마트에는 여유있게 시간을 배정했다. 남들은 하루면 구경이 끝난다는데. 내게는 이틀 반 정도가 적당했다. 요번은 3박을 배정해 두어서 체력이 괜찮았다. ‘하루를 온전히’ 보는 일이 가능했다. 빠르게 여행하면 넓이가 생기지만, 속도가 느리면 깊이가 생긴다.

수네가 전망대를 오르기로 했다. 마테호른을 한 번만 보는 건 아쉬웠고, 어제의 기억이 정말 좋아서. 평소 부모님이 등산을 가자고 하면 귀찮아 하는데도, 의욕이 부쩍 생겼다. 무엇보다 수네가에서는 바이크를 빌려준다는 얘기가 있어 솔깃했다. 전날 하이킹에서 산악 자전거를 타고 내려가는 사람들이 내심 부러웠었다. 온 김에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자, 정신으로 룰루랄라 수네가 역에 내렸다.

그런데....

알고보니 여기서 대여하는 건 일반 산악자전거가 아니라 ‘킥바이크’라고 불리는 특별한 자전거였다. 거대한 킥보드 같은 느낌인데, 초보자는 절로 투명의자 자세를 하게 된다. 이걸 타고 체르마트까지 쭉 내려간다. 트래킹 코스와 다른 별도의 길이 있어서 호수는 볼 수 없었다. 대신 울창한 산 속 풍경을 만끽할 수 있다. 돌멩이가 나올 때마다 헬멧과 몸이 덜그덕 거려서, 망아지를 타고 가는 느낌이었다. 허리와 다리가 무지 땡겼지만, 어린 시절로 돌아간 마냥 유쾌했다. 스위스는 정적인 여행을 하리라 생각했는데 졸지에 이런 액티비티를 하게 되다니. 흥이 절로 났다.

도착을 3,40분 정도 남겨두고는 풍광을 즐길 수 있는 레스토랑들이 등장한다. 인도인 요리사가 있는 곳에서 치킨 마살라를 먹었다. 새파란 하늘과 눈부신 구름, 파릇한 나무향을 누리는 식사란 그 자체로 꿀맛.

두시 반에 일정이 전부 끝났다. 나머지 시간은 마을에서 빈둥거렸다. 산책하다가, 카페에 들렀다가, 지나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노닥거리기. 일기를 쓰고, 멍하니 있다가, 디저트를 하나 더 시키기. 때로 많이 괴로워도, 인생의 러블리함은 포기할 수 없지. 라고 휘갈긴 후 끄덕이기.

DAY 7

Sep 24 2018

체르마트

스위스CH

생모리츠

스위스CH
느린 영혼들의 순례

드디어 그 날이 왔다. 스위스 여행의 하이라이트. 세상에서 가장 느린 ‘빙하특급열차’ 타기. 한국에서는 희안하게도 생각이 멈추질 않는다. 팔십 퍼센트는 집단적으로 공유하는 불안의 탓이다. 내가 원하는 걸 알고 추구하기도 전에, ‘이런 걸 해 놓아야 하지 않을까?(남들이 그렇게 말하는데.) 자격을 증명해야 하지 않을까?(남들이 날 인정하지 않으면 어쩌지.) 나는 왜 이렇게 무력할까? 더 열심히 했어야 하지 않을까? (남들만큼...)’ 등의 생각을 끊임없이 한다. 결국 그건 내 본연의 에너지를 소진시킨다. 여행 계획을 잡을 때에도 이미 정신과 체력이 많이 지쳐, 활발하게 돌아다닐 기력이 부족한 상태였다. 한없이 기차나 타고 돌아다니고 싶었다. 와중에 하루를 꼬박 써 여덟 시간 남짓을 달리는 세상에서 가장 느린 기차라니. 남들은, 어떤지 몰라도 나는 이 기차를 타고 싶었다.

아침 일찍 열차 여행 시작. 세 시간쯤 달리다가 가장 지루한 터널 구간이 나오면 점심 식사를 준다. 돼지고기 요리와 익힌 시금치, 구운 마카로니 한 접시를 먹었다. 디저트로 나온 라즈베리 타르트를 우물대다가 챙겨간 시집을 읽었다. 산 속에서 유람선을 타는 기분이었다. 매번 창 밖의 풍경이 바뀌어 정신을 못 차릴 정도.

가을물이 번지는, 거인의 발가락 같은 산맥도 지났다. 초록 고래떼가 헤엄치는 것처럼 울룩불룩한 광경. 중간 중간 별처럼 흰 집들이 박힌 마을을 지나면, 하늘과 가까워질수록 다채로운 색의 협연이 펼쳐진다. 파도가 부서지는 모양의 구름들이 산 꼭대기에 걸리고, 강물과 폭포들이 무수히 반짝인다. 3면을 감싼 창문 덕에 눈을 감으면 햇살이 공간 전체를 덮는 느낌. 꼭 하얀 잠을 자며 달리는 것 같다.

내게 천국은 이르지만, 영혼들이 순례를 떠나는 길이 있다면 이런 풍경이길 바란다. 머리가 희게 샌 앞자리 할아버지의 눈은 먹지를 대고 물감을 흘린듯 파랗다. 나무들은 새의 깃털처럼 솟아있다. 가슴을 가르고 빛나는 물을 내보이는 산은 끝부터 보라와 마른 주황을 고이 치장했다. 누군가는 꾸벅꾸벅 졸고, 누군가는 음악을 듣고, 누군가는 맥주나 와인을 마시고. 나는 사진을 찍다가, 펜을 들다가, 독서를 하다가, 구경에 빠져들다가. 온전한 여덟 시간이 나와 자연의 것이었다. 며칠 전까지는 모든게 소용 없고 초라한 느낌에 자주 치를 떨었다. 이 기차에서는 묵묵히 앉아있기만 해도 안정감이 느껴졌다.

나는 다시 요람에 누운 아기가 되어, 흔들흔들 실려가다 세상과 죽음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자연이 이렇게 대답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일도, 증명도, 모니터나 텔레비전 아니면 거울에서 보여지는 그 무엇도. 네가 아냐.
내가, 너야.

DAY 8

Sep 25 2018

생모리츠

스위스CH

Lake Saint Moritz

스위스CH

취리히

스위스CH
당신의 물빛

생모리츠는 다른 지역들보다 추웠다. 하지만 가장 환상적인 호수를 가진 곳이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호숫가로 향했다. 마을의 1/3쯤 되는 커다란 호수. 한쪽에서는 양떼의 목에 달린 종이 뎅그랑, 뎅그랑. 다른편에서는 교회의 종소리가 품위있게 울린다.

두 시간쯤 천천히 걸으면 둘러볼 수 있는 생모리츠의 호수는 환상적이다. 어딜 걷느냐에 따라 다양한 물빛을 감상할 수 있다는 점이 특히 그렇다. 같은 호수라도 때론 진한 파랑을, 어느 지점에서는 투명한 옥색을, 햇살을 받으면 지상의 은하수처럼 자태를 바꾼다.

찬란하게 물결치는 호수의 곁에서, 비로소 잠깐 제정신이 들었다. 머릿속을 혼잡하게 떠다니던 불순물이 가라앉고, ‘나의 빛깔’이 떠오른다. 누군가에게 애써 설명하고 싶지도, 증명하고 싶지도 않았다. 다만 드러나는 일이 되도록. 나는 지나간 것들에 미련이 많고, 겨울의 곰처럼 미련하지만. 물이 가르쳐주는 것들을 따라 매번 새로워지기를 멈추지 않고 싶다.

울음이 가르쳐주는 것들이 있으면, 잘 귀기울여야 한다. 누군가 때문에 많이 운 적 있다면, 분명 사랑이듯이. 울고 난 후엔 조금 헐떡이는 가슴이 꼭 숨을 들이마시듯이. 물이 있는 곳엔 진실이 있으니, 우리의 몫은 그게 잘 흐를 수 있도록 삶을 조율하는 일 뿐이다.

DAY 9

Sep 26 2018

취리히 공항

스위스CH

인천국제공항

대한민국KR

천사의 이슬같은 풍경들을 뒤로 하고, 도시로 돌아왔다. 건물과 사람들이 번듯하지만, 어쩐지 찾아오는 어지러움, 긴장감. 괜한 신세한탄. 남들을 일찍 제쳐봤자 빨리 죽기밖에 더 할까. 그러나 한국에 돌아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조급증이 재발할 걸 안다. 하지만 서른의 가을, 어느 날에 세상에서 가장 느린 기차를 타고 달려도, 오로지 푸른 물들에 휩싸여 힘을 빼고 걸어도, 누군가에게 사과 하나 선물할 줄 아는 하루를 보낸다면 괜찮을거야.

지구의 태반은 푸르다. 내가 억압한 꿈속에서라도 찬란한 물결은 흐른다. 고개를 돌리면 잠시 잊혀지지만, 그대가 살고 싶을 때에는 다시 곁에 나타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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