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1

Jul 29 2018
"말(馬)은 태어나면 제주도로,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

"우리나라는 중국과 달리 서울 문밖에서 몇십 리만 떨어져도 태고(太古)처럼 원시 사회라 서울 가까이 살면서 문화(文華)의 안목을 잃지 않아야 한다."

"서울은 단순히 한국의 최대 도시가 아니라 서울이 곧 한국이다."

"모든 한국인의 마음은 서울에 있다. 어느 계급일지라도 서울에 사는 사람들은 단 몇 주라도 서울을 떠나 살기를 원치 않는다. 한국인들에게 서울은 오직 그 속에서만 살아갈 만한 삶의 가치가 있는 곳으로 여겨진다."
한국 최고의 복합문화예술 공간

오페라 하우스, 음악당, 미술관, 서예관, 예술자료관, 야외극장을 갖추고 있는 예술의전당은 한국 최고의 복합문화예술공간이다. 다양한 장르의 문화예술행사가 동시에 열릴 수 있는 세계적인 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각 장르별 특성을 살려 지은 전용공간은 완벽한 예술체험이 가능하다. 

민화(民畫) : 서민들의 예술

민화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서민계층의 장인들이 그리고, 역시 서민들 사이에서 널리 감상되었던 민간예술적인 그림이다. 대부분 생활공간을 장식하고 각종 행사장에 사용하는 등 생활미술의 성격을 강하게 지니고 있다. 민화의 종류로는 산수(山水), 인물(人物), 화조(花鳥), 영모(翎毛), 어해(魚蟹) 등이 있다. 그리고 소재로는 재미있고 풍부한 민간설화, 무속신앙, 각종 고사(故事) 등이 즐겨 그려졌다.

성종, 정현왕후와 중종의 릉(陵)

선릉은 왕과 왕비의 무덤이 같은 능역 안에 있으되 언덕을 달리하는 이른바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이다. 선정릉 입구를 들어서 서북쪽으로 보이는 것이 성종(成宗)의 능이며 왕후의 능은 건너편 동북쪽의 숲속에 자리 잡고 있다. 이러한 구조 덕에 멀찍이 떨어진 두 능 사이는 울창한 숲이 이루어졌고 전체 능역 외곽으로는 산책로가 잘 조성되어 시민들의 휴식처로 이용되고 있다. 산책로는 입구에서 바로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오른쪽 길을 선택하면 관리사무소와 재실(齋室)을 지나 정릉 앞으로 연결된다

강남권을 대표하는 산업지구

한국의 중동 진출이 한창이던 1977년 6월 17일 이란의 수도 테헤란(Teheran) 시장의 방문을 기념하여, 서울시청이 테헤란과 서울의 지명 한 곳을 바꿔 부르는 것을 제안해 지금의 명칭에 이르렀다. 소프트웨어 및 정보통신 벤처기업이 많이 입주했으며, 도로 주변의 업무 지구 뒤쪽에는 아파트 등 주거환경지역이 인접해 있다. 

한국의 정치, 경제, 방송계

한강에 발달한 범람원으로 영등포 쪽에 작은 샛강이 있다. 모래땅으로 이루어진 쓸모없는 벌판이었으나 축조 및 신개발 사업이 착수되었다. 그 결과 현재 국회의사당, 한국방송공사, 동아일보사 별관, 전국경제인연합회, 순복음교회와 각종 금융관계사, 아파트 등이 밀집해 있으며, 63빌딩, LG 쌍둥이 빌딩 등 고층건물이 들어서 있다.

DAY 2

Jul 30 2018
서울을 대표하는 랜드마크

남산은 수도 서울을 상징하는 시내 중심에 위치한 산이다. 해발 265m로 높지는 않지만 정상에 있는 서울타워의 높이가 더해져 남산이 주는 느낌은 당당하다. 그리고 N서울타워는 1969년 TV와 라디오 방송을 수도권에 송출하기 위해 한국 최초의 종합 전파탑으로 세워졌으며, 현재는 서울의 대표적인 복합문화공간이자 랜드마크로 자리 잡았다.

해방 후에 생긴 마을

1945년 8•15 해방과 더불어 해외에서 돌아온 동포들과 월남 동포들이 이 부근 산기슭에 임시 거주처를 마련하고 살게 된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처음에는 해방 후에 생긴 마을이라 하여 해방동이라 하였으나 일반적으로 해방촌이라 불렀다.

 회나무로

국군재정관리단 정문에서부터 남산 그랜드 하얏트 호텔 방향으로 이어지는 길과 주변 골목길을 이른다. 2012년 국군재정관리단으로 통합된 육군중앙경리단이 있었던 곳에서 길 이름이 유래됐다. 근처에 주한미군 부대가 위치해 있어 외국인들이 다수 거주하는 공간이었던 이곳은 다양한 종류와 개성을 가진 식당과 카페 등이 들어서면서 서울의 주요 관광 코스가 되고 있다.

 모든 외국인들의 집결지

이태원에는 외국인과 외국 공관이 집중되어 있다. 외국인을 위한 호텔, 음식점, 상가 등이 늘어나면서 이태원에는 유동인구가 크게 늘어났다. 증가된 유동인구에는 외국인뿐만 아니라 내국인도 포함된다. 즉, 이태원은 우리나라에서 초국적 공간을 대표할 수 있는 지역이다.

짜장면의 탄생지

130여 년 전 인천항 개항 이후 선린동 일대는 청(清)나라의 치외법권 지역으로 지정되었다. 중국의 건축 방식을 본뜬 건물이 세워졌고 중국 상인들도 하나둘 모여들며 차이나타운이 형성되었다. 당시 중국 산동(山東)에서 건너온 화교(華僑)들은 선린동 지역에 중국요리점을 열었다. 그들은 한국인의 입맛에 맞는 음식을 개발했는데 그 노력 끝에 만들어진 것이 짜장면이다.

도심 속 거대한 휴식 공간

송도국제도시의 핵심지구인 국제업무단지 내 첨단업무지구와 주거단지 가운데 위치한 송도 센트럴파크는 도시의 열섬 현상(Heat Island Effect)을 막고 빗물을 효율적으로 재활용 할 수 있는 최신 공법으로 조성되었다. 우리나라 최초로 바닷물 끌어와 수상공원을 조성하였으며, 수상택시도 운행을 한다. 주변에 특급호텔들이 있으며, 근거리에 쇼핑몰도 있어 휴양관광지로 각광받고 있다.

DAY 3

Jul 31 2018
3·1 운동이 일어났던 곳

1919년 3. 1 운동의 발상지로 처음으로 독립 선언문을 낭독하고 독립 만세를 외친, 우리 민족의 독립 정신이 살아 숨 쉬는 유서 깊은 곳이다. 1992년 5월 28일 공원 명칭을 파고다 공원에서 탑골 공원으로 개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종각(鐘閣)

보신각은 도성 안팎에 시간을 알리는 종루(鐘樓)가 있던 곳이다. 종각이라는 지명은 종로 1가 네거리 동남쪽 모퉁이에 보신각이 있어서 붙여진 지명이다. 종로(鐘路)라는 명칭 역시 마찬가지다. 종각 일대는 조선시대나 지금이나 많은 사람의 왕래가 이어지는 서울의 중심거리 중의 중심거리이다.

청계천(淸溪川)이 시작되는 지점

청계천 복원 사업이 이루어지던 2005년 3월 서울특별시에서 지명위원회를 열어 확정한 명칭으로, 청계천의 시작 지점인 세종로 동아일보사 앞 광장을 가리킨다. 청계천으로 진입하는 공간으로서 삼색 조명이 어우러진 촛불 분수와 4m 아래로 떨어지는 2단 폭포가 설치되었다. 2단 폭포 양옆에는 8도(道)를 상징하는 석재로 팔석담(八石潭)을 조성하였는데, 밤이면 불빛과 물이 어우러져 멋진 경관을 빚어낸다. 

서울의 중심

서울 광장의 역사는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다가 덕수궁으로 돌아온 1897년부터 시작된다. 황제의 자리에 오른 고종은 나라의 기틀을 새로이 하기 위해 덕수궁 대한문 앞을 중심으로 하는 방사선형 도로를 닦고 앞쪽에는 광장과 원구단을 설치하였다. 이때부터 대한문 앞 광장은 고종 보호 시위, 3.1 운동, 4.19 혁명, 한일회담 반대 시위, 6월 민주화에 이르기까지 시민들의 주요 무대가 되었다.

고종(高宗)의 황제 즉위식이 거행된 곳

환구단은 1897년에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환궁하면서 황제 즉위식을 지낼 수 있도록 조성된 3층의 화강암 제단이다. 환구단 조성 2년 후인 1899년(광무 4년)에는 8각 모양의 3층 지붕인 황궁우(皇穹宇)를 조성하고, 신위판(神位版)을 모셨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 일제에 의해 해체되었으며, 그 자리에 조선 호텔이 들어서면서 현재는 황궁우와 용무늬가 새겨진 석고(石鼓), 그리고 석조 대문만이 보존되어 있다. 

대한제국의 황궁(皇宮)

경운궁이 다시 왕궁이 된 것은 1896년에 명성 황후가 경복궁에서 시해된 뒤 암살의 위협을 피해 러시아 공사관에 머무르던 고종이 이곳으로 거처를 옮기면서부터였다. 이후 경운궁은 대한제국의 정궁이 되었고 역대 임금의 영정을 모신 진전, 정전인 중화전은 물론 정관헌과 돈덕전 등 서양식 건물이 들어섰다. 이때 궁의 정문인 대안문도 수리되었는데, 문의 이름도 대한문으로 바꾸었다. 1907년 고종은 황제의 자리에게 물러났고 아들인 순종이 뒤를 이었는데, 순종은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고 고종은 계속 경운궁에 머물렀다. 이때 궁의 이름을 ‘덕수궁’으로 바꾸었다. ‘덕을 누리며 오래 살라.’는 뜻이다. 1910년에는 궁궐 안에 서양식의 대규모 석조 건물인 석조전이 세워졌다.

한국 근대미술발전의 터전

덕수궁 내에 위치한 국립현대미술관 분관으로 1998년 개관하였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의 설립 목적은 한국 근대 미술의 형성과 전개 과정을 체계화하여 궁극적으로 우리 민족의 문화와 역사적 정체성을 구현하기 위함이다. 덕수궁미술관은 190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한국 근대 미술뿐만 아니라 아시아 및 서구 근대미술을 함께 다루고 있다. 기획전시, 소장품 전시를 비롯하여 근대 미술 관련 조사연구, 출판, 교육, 학술행사와 같은 여러 활동을 통해 미술의 물적, 인적 교류를 도모하고 한국 미술의 세계화에 기여하고자 한다.

서울의 미술 문화 공간

서울 시립미술관은 미술작품을 체계적으로 수집, 보존하고, 다양한 기획전을 통해 미술을 일반 시민들에게 알리며, 다양한 교육 강좌를 운영하여 미술문화 발전에 기여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이 밖에도 현대미술의 발전을 위해 연구, 조사하고, 다양한 출판 활동과 작가 지원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있다.

한양(漢陽) 도성의 정문

서울의 정문, 국보 1호 숭례문. 한양 도성의 남문이자 정문의 역할을 했던 문으로 한양 성곽과 함께 만들어졌다. 숭례문은 임진왜란이라는 국난(國亂)에도 불구하고 온전하게 보존되어 오다 일제강점기 때에 이르러 문의 양 끝으로 이어져 있던 성곽이 허물어지고 그 옆으로 전차와 차들이 다니게 되면서 600년 조선 왕조의 정문 역할을 마감하게 된다. 이후 100여 년 동안 달리는 차들과 높은 빌딩에 둘러싸여 외딴 섬처럼 외롭게 서 있던 숭례문은 2005년 주변 차로를 정리하고 공원을 꾸미는 공사를 통하여 다시 가까이에서 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2008년 일어난 방화사건으로 인해 소실되었다가 2013년에 복구되었다

구(舊)서울 역사(驛舍)

이 웅장한 벽돌 건물은 한때 식민지의 관문이었다. 일본은 이곳을 통해 만주뿐 아니라 모스크바와 베를린까지 연결시키려고 했다. 패전으로 일제의 야망은 사라졌으나 서울역은 여전히 한반도 교통의 중심이었다. 10여 년 전 새로운 역사가 건축되면서 옛 서울 역사는 '문화역 서울 284'라는 이름의 복합문화공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생생하게 기록된 전쟁의 역사

호국 전쟁의 실체를 보여주는 자료를 보존 전시하고 국민정신교육장으로 역할을 하며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선열들의 숭고한 희생을 추모하고 그 업적을 기리기 위해 전쟁기념사업회에서 1994년 6월 10일 전쟁기념관을 세웠다. 전쟁기념관은 옥내 전시와 옥외 전시로 구분되어 있으며 3만 3천여 점의 소장 유물 중 1만여 점을 전시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보물창고

국립중앙박물관은 13만 5,000여 점의 소장 유물 중 약 6,300여 점의 유물을 18개 전시실에 상설 전시하고 있다.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국보 제78호), 경천사 십층 석탑(국보 제86호), 보신각 종(보물 제2호)을 비롯해 김홍도의 풍속화 등 고고, 역사, 민속, 자기, 서화에 관련한 우리나라 대표 유물을 다수(국보 96점, 보물 113점) 소장하고 있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중국, 일본, 중앙아시아의 문화재도 전시하고 있다.

DAY 4

Aug 01 2018
조선 왕조의 뿌리

종묘는 조선 왕조의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神主)를 모시고 제사를 지냈던 곳이다. 또한 종묘는 위엄이 느껴지는 건축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장엄하면서도 절제된 아름다움을 동시에 갖춘 모습이다. 정전(正殿)과 영녕전(永寧殿)을 중심으로 모든 건물들이 하나같이 주변 경관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있어 웅장하면서도 신성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조선 후기의 정궁(正宮)

창덕궁은 원래 정궁이었던 경복궁의 이궁(離宮)으로 지었다. 그렇지만 창덕궁은 조선 전기부터 국왕이 정치나 외교 업무를 하는 데 자주 이용되었다. 임진왜란 때 창덕궁은 경복궁, 창경궁과 함께 불에 탔다. 창덕궁과 창경궁은 광해군 때 다시 지었지만, 경복궁은 불에 탄 채 그대로 두었다. 그래서 조선 후기 왕들은 주로 창덕궁에 머물면서 통치했는데, 이 때문에 창덕궁이 경복궁 대신 정궁 역할을 한 것이다.

창덕궁과 연결된 동궐(東闕)

창경궁은 세종이 상왕인 태종을 모시고자 1418년에 지은 수강궁이 그 전신이다. 이후 성종 임금 대로 와서 세조의 비 정희왕후, 덕종의 비소혜왕후, 예종의 비 안순왕후를 모시기 위해 명정전, 문정전, 통명전을 짓고 창경궁이라 명명했다. 창경궁에는 아픈 사연이 많다. 임진왜란 때 전소된 적이 있고 이괄의 난이나 병자호란 때에도 화를 입었다. 숙종 때의 인현왕후와 장희빈, 영조 때 뒤주에 갇혀 죽임을 당한 사도세자의 이야기 등이 창경궁 뜰에 묻혀있다.

 한양(漢陽)의 동쪽 성문

조선시대에 한양의 도성을 보호하는 문은 모두 8개였다. 흥인지문은 8개의 문 가운데 동쪽에 있는 문이다. 흥인지문은 돌을 쌓아 만든 아치 모양의 홍예문(紅霓門), 2층의 멋스러운 문루(門樓), 반달 모양의 튼튼한 옹성(甕城)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독특한 점은 도성에 있는 8개의 문 가운데 유일하게 흥인지문에만 있는 옹성이다.

비(非)대칭과 비(非)정형의 미학(美學)

우주선을 연상하는 세 개의 공간에는 알림터•배움터•살림터가 위치해 있으며, 외부에는 동대문 역사 문화공원•동대문 운동장 기념관 등 총 5개의 공간과 15개의 시설이 갖춰져 있다. 외관은 알루미늄 패널은 같은 모양이 하나도 없는 총 4만 5133개의 패널로 이뤄져 있으며, 노출 콘크리트 방식 역시 첨단 특수공법 및 설계기법이 상용된 국내의 우수한 기술력으로 만들어졌다. 건물 전체에서 직선과 기둥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그림에 취한 신선(神仙)

장승업은 산수, 인물, 영모, 화훼, 기명절지 등 다양한 소재를 뛰어난 기량을 발휘하여 자유자재로 구사했다. 그의 작품은 흩어진 듯 짜임새 있는 구성과 개방된 공간, 힘차고 능숙한 필법, 강렬한 묵법과 섬세한 설채법의 뚜렷한 대조, 화면 전체에 넘치는 생동감 등을 특징으로 한다. 반면 사의적 측면보다 기교적인 형태 표현에 치중한 점, 인물 묘사와 영모, 화훼, 절지 등 대부분의 작품에서 중국 취향이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 아쉬운 부분이다. 그럼에도 그의 천재적인 기량은 매우 뛰어난 것이어서 당대 제일의 ‘신품(神品)’ 화가로 칭송받았다.

한국에서 가장 높은 마천루(摩天樓)

한국적 곡선의 미(美)를 지닌 한국 전통의 도자기와 붓의 형상을 모티브로 설계된 롯데월드타워는 총 123층, 555M 높이로 한국 1위, 세계 5위의 초고층 빌딩이다. 대지면적은 축구장의 12.2배, 전체 총 면적은 축구장의 110배에 달하는 거대한 수직 도시이다. 

잠실 호수

동서(東西)로 같은 모양의 동호(東湖), 서호(西湖)로 나누어져 있으며 호수와 공원으로 조성된 이상적인 형태의 공원으로 조깅 코스 및 산책로가 설치되어 있어 시민들의 휴식 공간으로 널리 이용되고 있다.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47일

후금(後金)은 국호을 ‘청(清)’으로 바꾸고, 이제부터 조선은 ‘신하의 나라’라며 청나라에 신하로서 예(禮)를 갖추라고 요구했다. 이때 조선의 조정은 척화파(斥和派)와 주화파(主和派)로 나뉘었다. 결국 조선은 척화파의 주장이 우세하여 만주족(滿洲族)을 야만족이라 무시하며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청나라는 군대를 이끌고 정묘호란(丁卯胡亂)에 이어 다시 침입했다. 이것이 1636년에 일어난 병자호란(丙子胡亂)이다. 청나라 군대는 순식간에 한양 근처까지 쳐들어 왔고, 인조와 신하들은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47일간 대항해 싸웠다. 하지만 극심한 추위에다 식량마저 다 떨어지고 청나라의 거센 압박을 당해낼 수 없게 되자, 마침내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나와 굴욕적인 항복을 하고 만다.

DAY 5

Aug 02 2018
궁궐 밖의 궁궐

살아있는 유일한 왕의 생부이자, 격동의 근대사를 이끌었던 주역 중의 하나인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그는 집권하자마자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는데 힘을 기울였다. 이러한 대원군의 웅대한 개혁 정치의 중심에는 그의 사저인 운현궁이 있었다. 10년의 섭정 기간 동안 대원군 정치의 중심으로서 궁궐과 수시로 통하는 문이 생겼을 정도로 절정기를 맞이하기도 했지만 대원군의 실각과 고종의 친정 선포로 운현궁은 몰락의 길을 걷는다.

한옥(韓屋)의 아름다움

청계천과 종로의 윗 동네라는 이름에서 ‘북촌(北村)'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었으며, 당시로써는 왕실의 고위 관직에 있거나 왕족이 거주하는 고급 주거지로 유명하였다. 곳곳에 아직까지 남아있는 몇 채의 한옥들은 이때의 명성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여러 채의 한옥이 지붕 처마를 잇대고 벽과 벽을 이웃과 함께 사용하고 있는 풍경은 우리가 잊고 살았던 따뜻한 정과 살아갈 맛을 느끼게 해준다. 북촌 지역을 걷다 보면 이어진 처마 선이 아름다워서 골목길의 정겨움을 느낄 수 있다.

일상 속의 미술관

도심 속에 위치해 일상 속의 미술관을 지향하고 있다. 서울관의 대표적 공간인 서울 박스를 비롯하여 전시동과 교육동 등 7개의 동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시민들과 함께 공유하고, 손쉽게 순수 미술을 접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전시공간 외에도 영화관과 멀티 프로젝트 홀이 있어 다양한 문화를 접할 수 있다.

민속 문화를 한자리에

국립민속박물관은 우리나라 전통생활양식과 관련된 4,000여 점의 민속자료가 전시된 있는 국내 유일의 민속생활사 관련 국립•종합 박물관으로서 경복궁 안에 있다. 민속문화의 연구•수집•보존과 문화 교육 및 생활문화 전시로 전통문화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통한 민족적 자긍심을 일깨울 수 있는 문화 교육의 현장이며, 전통과 현대가 어우른 문화의 전당이다. 

조선 왕조의 법궁(法宮)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다섯 개의 궁궐 중 첫 번째로 만들어진 곳으로, 조선 왕조의 법궁이다. 한양을 도읍으로 정한 후 종묘, 성곽과 사대문, 궁궐 등을 짓기 시작하는데 1394년 공사를 시작해 이듬해인 1395년에 경복궁을 완성한다. ‘큰 복을 누리라’는 뜻을 가진 ‘경복(景福)’이라는 이름은 정도전이 지은 것이다. 그러나 경복궁은 조선 왕조와 더불어 여러 번의 시련을 겪었다. 경복궁은 임진왜란 때 불이 나 무너지게 되는데 조선 말 고종 때 흥선대원군의 지휘 아래 새로 지어진다. 경복궁 중건을 통해 조선 왕실의 위엄을 높이고자 하였지만 얼마 되지 않아 건청궁에서 명성황후가 살해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이 이곳을 떠나 러시아 공사관으로 가게 되니, 단청의 색이 채 마르기도 전에 또 다시 빈집이 되어 버리는 비운을 겪는다. 일제 때 중앙청이라 불렸던 조선 총독부 건물을 경복궁 내에 만듦으로써 조선 왕조의 상징을 훼손하고 조선의 자존심을 무너뜨렸으며, 정문인 광화문 또한 해체해 지금의 건춘문 자리 근처로 옮겨버렸다

경복궁의 대문(大門)

광화문은 경복궁의 남문이며, 궁성의 정문이다. 광화문은 국왕이 드나드는 정문이기도 했지만, 조선의 법궁인 경복궁의 정문이었기 때문에 다른 궁궐의 정문에 비해 그 규모와 격식 면에서도 매우 웅장하고 화려하다. 태조 때 정도전이 ‘사정문(四正門)’과 ‘오문(午門)’이라고 이름 붙였으나, 세종 때 집현전 학사들이 ‘왕의 큰 덕(德)이 온 나라를 비춘다.’는 뜻의 광화문(光化門)이란 이름을 지어 올려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도심 속의 광장

2009년 8월 1일, 새로운 모습으로 단장하여 시민들에게 개방된 광화문 광장은 600년 역사를 지닌 서울의 중심거리 세종로를 차량 중심의 거리에서 인간 중심의 공간으로 전환하고, 경복궁과 북악산 등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조망할 수 있는 공간으로 새롭게 조성하여, 세종로의 옛 모습인 육조(六曹) 거리 복원을 통한 역사•문화 체험 공간으로 재탄생되었다.

서궐(西闕)

경희궁을 서궐이라 일컬으면서, 인조 이후 역대 왕들이 당시의 법궁인 창덕궁과 이곳을 번갈아 오가며 정무를 보고 생활을 영위했었다. 하지만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과 더불어 서울의 5대 궁궐로 꼽히던 경희궁은 궁궐이 아닌 제례 공간 종묘에 그 자리를 넘겨주고 잊혀진, 사라진 궁궐이 되어버렸다.

일제(日帝)의 압제

일제는 저항하는 사람들을 가둘 감옥이 필요했고 그 결과 '경성감옥'이 대규모로 세워지고 증축이 이어진다. 이 감옥이 바로 '서대문형무소'이다. 일제 만행의 상징이 지금은 볼 수 없는 '조선총독부 청사'라고 한다면, 약 40년 동안 일제의 억압을 견디고 저항한 민족의 상징은 '서대문형무소'이다. 

자주독립을 위해 세운 문(門)

1884년에 있었던 갑신정변(甲申政變)에 실패한 뒤 미국에 망명해 있던 서재필이 1896년 귀국하면서 조직한 단체가 독립협회였다. 그는 이 독립협회를 기반으로 사대외교의 표상인 영은문(迎恩門)을 헐어버리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울 것을 당시 뜻있는 인사들에게 발의하였다. 즉 독립문 건립은 오래도록 계속되어온 중국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는 동시에 당시 우리나라를 위협하고 있던 일본, 러시아, 서구 열강들의 간섭으로부터 탈피하여 영구 독립을 이루기 위한 상징으로 세워진 것이었다.

DAY 6

Aug 03 2018
100년 된 골목

종로3가역 4번 출구에서 좁은 골목을 따라 몇 걸음 들어가면 시간 여행을 떠나온 듯한 풍경과 마주친다. 1920년대에 지은 한옥이 어깨를 맞대고 늘어선 익선동이다. 

전통과 현대의 조화

인사동은 도심 속에서 낡지만 귀중한 전통의 물건들이 교류되는 소중한 공간이다. 인사동에는 큰 대로를 중심으로 사이사이 골목들이 미로처럼 얽혀 있다. 이 미로 속에는 화랑, 전통 공예점, 고(古)미술점, 전통 찻집, 전통 음식점, 카페 등이 밀집되어 있다. 

 쾌적한 공원 경관

낙산은 일제강점기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상당 부분 파괴•소실되었고 특히 60년대 이후의 근대화 과정에서 무분별한 도시계획으로 인해 아파트와 주택이 낙산을 잠식한 채 오랜 시간 방치되어 역사적 유물로서의 제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에 서울시에서는 공원녹지 확충 5개년 계획의 일환으로 낙산을 근린공원으로 지정하고 주변의 녹지축과의 연결을 도모하면서 낙산의 모습과 역사성을 복원하는 사업을 추진하게 되었다.

벽화 마을

이화동 일대에 주민과 예술인, 대학생과 자원봉사자의 참여로 벽화가 그려졌다. 그리하여 이화마을 곳곳에 그림과 조형물이 탄생하였다. 그 결과로 이화 벽화마을은 건물과 주변 환경, 예를 들어 화분, 전봇대, 돌담, 계단 심지어 벽의 균열까지 예술의 일부가 되었다. 

예술가의 거리

‘예술가의 거리’ 라 불리는 신사동 가로수길 주위로는 아기자기한 커피숍과 맛집, 디자이너들의 옷 매장들이 즐비해 있어 이국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이러한 신사동 가로수길만의 독특한 분위기 덕분에 평일에도 카메라를 들고 여기저기서 사진을 촬영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특히 가을에는 낙엽 지는 거리를 보러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며, 젊은이들의 입소문을 타고 유명세를 치른 이후 많은 영화의 배경지로 나오기도 했다.

 정조(正祖)가 머물던 임시 처소

행궁은 정조가 사도 세자의 묘(廟)인 현륭원(顯隆園)에 행차할 때 임시 거처로 사용하던 곳으로 그 어느 행궁보다 크고 웅장하였으며 활용도도 높아 경복궁의 '부궁(副宮)'이라는 말까지 생겨난 곳이다. 정조 18~20년에 화성을 축성하고 팔달산 동쪽에 행궁을 건립했는데 평상시에는 유수부(留守府) 관청으로 사용되던 곳이다.

정조(正祖)의 꿈(夢)

정조는 임금의 자리에 오른 뒤 사도세자의 능(陵)을 양주에서 수원으로 옮겼다. 풍수지리설에 따라 명당 자리에 능을 새롭게 만든 뒤 아버지를 기리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 백성들을 수원 지역에 옮겨 살게 하면서 화성을 짓기 시작했다. 물론 수원 화성을 지은 이유가 사도세자를 기리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정조는 한양(漢陽)의 남쪽에 방어 기지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고, 당쟁(黨爭)이 심했던 당시의 분위기를 새롭게 하여 왕권(王權)을 튼튼히 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화성은 정조의 통치 철학과 당시의 과학 기술이 잘 어우러진 신(新)도시로 건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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