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평범한 겨울, 여름으로 떠날 기회가 생겼다.
한국과는 너무도 다른 날씨의 세부, '겨울'이라는 개념이 없는 곳. 그곳에서 즐긴 나흘간의 여름은 따뜻했다.

필리핀 세부 공항에 내리자마자 입고있던 레깅스가 너무도 답답했다. 다른 나라에 왔다는 것을 공항에서부터 실감한 건 처음이었다. 얼른 화장실에 들어가 여름옷으로 갈아입고 밖으로 나와 택시를 타고 보홀섬에 들어가는 배를 타는 선착장에 도착했다.

세부는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많은 섬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세부 본섬에서는 보통 기대하는 액티비티가 많지 않고, 스노쿨링이나 다이빙 등을 즐기려면 옆에 있는 보홀섬으로 가야한다. 그 이외에도 올랑고섬 등 다양한 섬들이 많은데, 나의 이번 여행코스는 보홀섬-올랑고섬 두 군데이다.

보홀 숙소에 도착하니 해질녘. 가까운 바다에 나가 가볍게 산책을 하고 해변가에 쭉 늘어서 있는 식당 중 한곳을 선택해 앉았다.

긴 여정에 잠도 부족해서 과하게 시킨 음식을 먹고나니 눈이 감긴다. 밤하늘에 떠있는 별도 꿈만같다. 다음날을 기약하며 일찍 들어갔다.

다음날 아침, 우리는 예약했던 스노쿨링을 위해 밖으로 나왔다. 현지인 가이드가 숙소 앞에서 우리를 기다린다. 그를 따라 어제 걸었던 해변으로 가 배를 탔다. 해변에는 비슷한 모양의 배가 여기저기 둥둥 떠있는데, 그게 모두 스노쿨링을 위한 배이다.

거의 일출 시간에 나와서 그런지 하늘이 노랗다.
모터소리가 덜덜거리며 귀를 찌르는 배를 타고 30분을 계속 같은 풍경을 보며 가자니,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가 생각난다. 목적지도 모르고, 어딘지도 모른 상태에서 작은 배 하나에 몸을 맡기는 것 외에는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거대한 바다 한 가운데에 있으면 어떤 기분일까. 사방이 뻥 뚫려있는 바다이지만, 하늘 색이 그대로 반영되어 색이 변하는 아름다운 풍경이지만 막막하기 그지없을 것이다.

티끌하나 없이 투명한 물에서 물고기들에게 밥을 주고, 수심 10미터정도 되는 저 아래에서 헤엄치는 자라를 본 후, 다음 섬으로 간다.
이름이 팡라오 섬이었나..? 아무튼 모래길로만 이루어진 건물 한두개가 전부인 정말 작은 섬이다.
가이드가 40분 밖에 시간을 주지 않아 물놀이를 할수는 없었지만, 그냥 걸으니 파라다이스의 사전적 정의가 이곳이 되어도 좋을만큼 평화롭고 멋있다. 햇빛이 정말 따갑지만 그럼 물속에 들어가면 된다.

와이파이도 없고 식당도 없는 무인도같은 이 곳에서 하룻밤을 묵으면 기분이 어떨까. 밤에는 얼마나 많은 별이 보일까.

일찍부터 움직였더니 스노쿨링을 끝내고도 해가 중천이다. 달콤한 아이스크림을 먹고, 우리나라 커피 한 잔 값 밖에 안되는 마사지를 받고서 저녁 반딧불이 투어를 위해 밖으로 나갔다.

숙소 앞까지 가이드가 픽업을 왔다. 반딧불이 투어는 가이드 1 : 관광객 1 로 짝을 지어 조그만 카약같은 것을 타고 노를 저어 반딧불 포인트까지 가서 구경하는 여정이다. 입구에 모여 설명을 듣고, 카약을 타러 갔는데, 사방이 너무 깜깜해서 나와 함께 타는 가이드 얼굴조차 보이지 않는다. 간신히 부축을 받아 카약에 타고 노를 젓기 시작했다.

달빛밖에 없는 정말 깜깜한 밤. 강물이 얼마나 깊은지조차 가늠할 수 없다. 괜스레 겁도 난다. 갑자기 악어가 나오면 어떡하지?
반딧불이는 빛에 민감하기 때문에, 정말 깜깜한 곳에서만 나타난다고 한다. 그래서 카메라 플래시를 절대 터뜨리면 안된다. 10분정도 노를 저었을까. 반짝이는 나무가 나타났다. 신기하게도 한 나무에 트리 장식을 한 것처럼 모여있다. 별빛과 어우러져 꿈 속 같다.
가이드에게 잡을 수 있냐고 물어보니 한마리를 잡아준다. 벌레라면 치를 떠는 나지만, 깜깜한 어둠 속에 있으니 용기가 난다. 생각보다 조그매서 징그러운 것 같지도 않다. 그리고 생각보다 밝게 빛나지는 않는다. 하긴 그 조그만 몸에서 빛을 내는 것조차도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겠지.

물에 떠있는 카약이 계속 흔들려서 사진을 제대로 담을 순 없었다. 하지만 생애 처음으로 본 반딧불이, 그것만으로도 감사한 밤이다.

다음날, 보홀섬에서 나와 다시 올랑고섬으로 가는 날.
바로 가는 방법이 없어 세부섬을 거쳐서 가야한다. 세부 섬에 돌아온 김에 잠시 쇼핑몰 구경을 하고 올랑고섬 가는 선착장에 도착했다.
배값은 한국돈으로 고작 몇백원. 왜 이렇게 싼가했더니 섬으로 들어가는 화물과 같이 타는 배이다. 주로 현지인들이 많이 이용하는 것 같다. 하긴 그러고보니 올랑고섬에 가는 관광객들은 별로 보지 못했다. 그러니 배에 탄 사람들이 우리를 신기하게 쳐다보는 것은 당연하다.

올랑고섬에 도착해서 다시 트라이시클을 타고 탈리마 리조트로 향한다. 후덕한 아주머니 한분이 기다렸다는 듯 우리를 반겨주신다.
방을 안내받고 리조트를 천천히 구경하는데, 이 숙소 엄청나다!
이 곳은 딱 내가 운영하고 싶은 그런 스타일의 리조트이다. 큰 정원안에 방들이 각각 다른 통나무집으로 나뉘어있고, 여기저기 짚으로 만든 큰 파라솔들 아래 야외침대와 썬베드들, 해먹과 야외 바(bar).

밤이 되니 시원한 바닷바람이 불어오고, 침대에 앉아 산미구엘 맥주 한 병을 마시며 별빛들을 바라보니 그야말로 천국이다.
비싼 몇십만원짜리 리조트도 아니고, 시원한 에어컨에 빵빵한 와이파이가 있는 호텔도 아닌 고작 한밤에 5만원짜리 리조트이지만 몇십만원의 가치가 있는 숙소였다. 게다가 사람도 없어 한적하니 좋지 않을 수가 없다. 이곳에 몇일이고 묵고싶었다.

아침에 버드생츄어리(Bird Sanctuary)로 향한다.
트라이시클을 타고 가는데, 가는 길이 엄청나다. 현지인들이 사는 마을을 지나가는데, 마주치는 아이들마다 우리를 신기하게 쳐다본다. 인사를 건네고 손을 뻗는 아이들도 있다.

처음 계획을 짤 때, 지도를 보니 정말 초록색밖에 없기에 지레 겁을 먹었다. 정글의 법칙에 나올 법한 풍경이 아닐까, 이동할 교통수단은 있을까.
막상 와보니 이 곳도 정말 사람사는 동네였다.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있고, 학교와 슈퍼 등 갖출건 모두 갖춘 엄연한 마을이었다. 거기에 활발한 아이들까지.

버드생츄어리는 입이 떡 벌어지는 대자연도 관광지도 아니다. 그저 돌다리와 특이한 나무가 멋있는 조류 보호구역. 관광객도 몇 없다. 큰 망원경으로 새들을 관찰하던 두 명의 소년들 뿐. 그들이 보여주는 새를 보며 함께 신기해했다.

다시 리조트로 돌아와서 참치샌드위치를 시켜 배를 채운 후, 스노쿨링 장비를 빌려 바다로 나갔다.
어제 보홀섬에서 갔던 스노쿨링 포인트만큼 깨끗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조금 나가니 물고기들이 보인다. 시간제한도 없으니 지칠때까지 물속에 있었더니, 선크림을 바르지 않은 손이 엄청 타버렸다.

마지막날, 그동안 그저 스쳐 지나왔던 마을의 아이들을 만나기 위해 숙소밖으로 나갔다. 유치원생 나이쯤 돼보이는 아이들이 "What is your name?"을 정말 또박또박 질문한다. 그맘때쯤 영어를 배우기 시작하나 보다.
호기심어린 큰 눈으로 바라보는 아이들에게 손인사를 해준다. 수줍어하는 아이들, 신나서 다가오는 아이들 등 천차만별이다.

하지만 공통점은 모두들 우리에게 호의적이고 너무나 순수해 보인다는 것. 6-70년대의 시골에는 서울에서 손님이 오면 우르르 몰려가 구경한다는데, 그게 바로 이런 느낌인가 보다.
가만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는 땡볕에 산책을 한다는 건 정말 힘든 일이지만, 해맑은 아이들 구경에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세부 섬으로 나갈 배시간을 맞춰야 하는데, 돌아가기가 너무 싫었다.
마을 구석구석 한곳도 놓치지 않고 구경하고 싶었다. 아무것도 없던 구글맵을 보고 괜히 겁을 먹은게 미안했다.

배 시간을 맞춰야해서 정말 잠깐 산책하고 돌아왔을 뿐이지만, 올랑고는 정말 매력적인 마을이다. 나중에 일상에 지칠때 다시 찾고싶은 마음의 안식처이다.
사람 바글거리는 관광지보다, 현지인이 살아가는 소박한 마을. 고급 레스토랑과 마사지샵이 늘어선 거리보다, 사람사는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거리.
나에게 세부는 관광지, 휴양지가 아닌 정말 '필리핀'스러운 그런 모습으로 새겨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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