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member, girl.
Tomorrow is another day"

열 여섯살 쯤에는 매일 퀸의 음악을 들었다. 지금에야 그 무렵의 우리는 중2할 권리가 있다며 적당히 부끄러워하는 기색으로 이불을 걷어찰 수 있는 나이가 됐지만, 과거의 시간은 고정되고 미래의 시간은 자꾸만 다가오는 법. 떠나간 우울의 시절도 돌이키면 그리움이 된다. 다니엘은 그 때 그 시절을 돌이키던 나에게 저렇게 충고했다.

레트 버틀러도 아니고 스칼렛 오하라는 더더욱 아니었던 다니엘은 언어교류에서 만난 이스라엘 총각이었다. 물론 나는 언어교류회에 참석한 보람 따위 하나도 없이 아직도 영어문맹으로 살고 있지만, 아마 지금도 이 지구 어디선가 다니엘은 유창한 한국어 실력을 자랑하며 살고 있을 것이다. 어쨌든.

그는 방황했던 기억을 자랑스러운 흉터처럼 쓰다듬고 사는 나에게 제딴에는 매우 진지하게 충고했다. 잊지 마,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고. 그러니까 쓸데없는 짓은 그만두고 일출이라도 보러가든지.

난 이미 몇 번의 일출에 실패 했었어. 변명처럼 말해봤지만 나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변명처럼이 아니라,
변명이란 걸.

다니엘과 헤어진 지 한참 후, 일을 하며 서른을 목전에 두었을 언젠가의 겨울. 문득 정동진을 떠올린 것은 그래서였을까.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홀린 듯 청량리역에서 정동진행 마지막 밤기차의 티켓을 끊고 있었다.

청량리역

대한민국KR

정동진역

대한민국KR

해가 보통 몇 시에 뜨더라. 감이 없이 플랫폼에 내려서자 사위가 검었다. 밤하늘과 밤바다가 구분되지 않는 그 모호한 일렁임.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하얀 김만이 계절감을 띄고 다가왔다. 한숨처럼, 신음이 먼저 튀어나왔다.

아놔, 졸라 춥네.

한해가 바뀌는 12월의 마지막날, 1월의 첫째날이 아니어서였을까.
해돋이를 보러 온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고백하자면 나는 이 때 조금 지쳐 있었다. 일에도 연애에도. 모든 것이 내게는 권태로 다가왔고 끝을 내지 못하는 스스로에 대한 지겨움에 숨이 막혔다. 그러면서 나도 모르게 조금쯤, 스스로를 동정하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혀를 차며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다니엘의 그 한 마디가 문득 떠오른 이유는 아마 그래서일 것이다.

그 순간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저기 봐, 해가 뜬다

황금의 실타래가 수평선을 찢고 조금씩 흘러나왔다. 몇 안되는 해돋이 인파들은 숨죽인 채 홀린 듯이 수평선이 하늘과 분리되는 그 순간을 지켜보았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침내 완연히 떠오른 태양. 사람들은 말할 틈도 아깝다는 듯 일출의 순간을 쉴 새 없이 카메라로, 핸드폰으로 찰칵찰칵 찍어댔다. 유례 없이 찬란한 황금. 여수 자산공원에서 세시간이나 덜덜 떨며 일출을 기다리다 흐린 날씨 때문에 포기하고 돌아서야했던 기억이 스르르 녹아 사라졌다.

일출을 한참이나 지켜보다가 문득 숨이 훅하고 터졌다. 아아, 이래서 사람들이 일출을 보러 오는구나. 묵은 체증이 한번에 사라지듯이, 무궁화호 밤기차의 좁은 좌석에 구겨져 달리느라 피곤한 몸도 한해 내내 시달리느라 지친 정신도 번쩍이는 태양빛에 휩쓸려 씻겨나가는 이 기분 때문에.

맞아, 다니엘.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뜨는 법이지.

날씨, 놀랄만큼 쾌청. 체감온도 영하 5도쯤. 사람, 적당함. 일출, 최고. 그날 돌아오는 길에 쓴 일기에 적혀있던 한 줄 감상.

스칼렛은 예언처럼 말한다.
레트, 레트. 당신은 꼭 돌아올거야. 나도 비슷한 심정으로 정동진역에서 수평선을 바라보며 꼭 돌아오겠노라 속삭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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