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경하던 선배가 하나 있었다. 업적의 존경스러움보다 생각하는 과정이 너무 신기해서 계속 말을 걸었던 선배였다. 단체여행에서 처음만났는데, 여행 하는 내내 밥 때엔 맥주를, 찰나의 쉬는 시간에는 차와 커피를 마시는 사람이었다. 모자를 눌러쓰고 담백한 무표정으로 혼자 무언가를 마시며 앉아있는 모습이 굉장히 인상깊었던 철학과 선배였다.

문득 선배가 생각나서 연락했다. 선배는 광주에서 살고 있다며, 아주 오랜 이야기들이 있기에 핸드폰으로 이야기하기는 어렵다며 지나가는 말로 (정말 지나가는 말이었을 것이다) 광주에 한번 놀러오라했다.

그래서 광주가는 KTX를 끊었다

선배는 그 때 그 모습 그대로 모자를 눌러쓰고 뿔테안경을 낀 채로 굉장히 어색한 표정(원래 표정이 그러하셨다)으로 맞이해주셨다. 서로 같이 아는 또 다른 선배가 그 전에 왔다갔다며 삼자간의 안부를 물으니 금방 여행 분위기가 났다. 그리곤 초보운전 딱지를 갓 뗀 선배는 무등산 아래 보리밥집으로 날 안내했다.

이름조차 남도다운, 온천 할머니집 보리밥은 과하게 맛있었고 푸근했다

남도의 음식은 젓갈이 강하다했다. 선배가 처음 서울에 왔을 때 가장 먹고 싶었다던 젓갈가득한 김치가 광주에선 흔하다하더라. 나에겐 약간은 짜고 약간은 비린 젓갈 가득 김치를 먹으니 여기가 전라도구나 실감이 났다. 아주 어릴 때 완도에 살았어서 일년에 한 번은 완도에 갔었다. 바다 옆에 있는 완도와 전라도 음식의 보고 광주는 비슷한 듯 달랐다.

광주의 테라스, 무등산 아래엔 우리동네 청계산 아래처럼 카페가 많았다. 개중 햇살이 가장 잘 드는 카페에 앉았다. 터키와 그리스에서 그랬듯, 우린 커피를 시켜놓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는 영문과를 나와 요리를 하고 있었고, 선배는 철학과를 나와 시장에서 도소매상을 하고 있었다. 여행에서 만나 학교에서 친해졌고 함께 청춘을 위한 행사를 기획했던 이야기를 하다보니 대학 새내기가 된 기분이었다.

'이지야, 세상을 살면서 정말 말도 안되는 일이 나에게 일어날 수 있고 극복하지 못하는 걸 뻔히 알면서도 받아들여야하는 경우가 생기더라'

선배는 나라면 절대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일의 중심에 있었다. 철학개론 수업에 배웠던 시지푸스 신화가 생각났다. 바위를 열심히 굴려 산 정상에 오르면 다시 산 아래로 굴려버리고, 그럼 시지푸스는 또 다시 하산하여 바위를 정상으로 끌어 올려야했다. '우리네 인생도 이렇듯 목표를 향해 달려가 목표가 이루어지면 새로운 목표를 세워야하고 어찌보면 의미없을 것 같은 일들을 계속 해야하는데, 왜 살아야할까?'라는게 철학적 질문이었다.

죽을 때까지 해결될 일인지 모를 일을 계속 하는 것이 의미있을까

내가 일을 하고 있는데 일의 끝이 보이지 않았을 때의 절망감 같은 게 아닐까 싶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둥을 잡고 의연하게 살아가는 선배가 대단했다. 간만에 만나 선배랑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살아왔던 이야기, 살아가는 이야기, 앞으로 살아갈 이야기. 담양의 하늘이 예뻐서일까- 생각하지 못했던 생각들을 끄집어내어 대화했고 공감했다.

선배랑 헤어지고 난 광주시내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아침 일찍 눈이 떠져 일찍 채비를 마치고 근처 시장을 구경한 후 순천으로 떠날 계획이었다.

광주의 거리는 고요하고 묵직했다

518 행사 때 우연찮은 기회로 광주에 왔던 적이 있었다. 힘있고 강렬한 사람들 사이로 오래된 건물들이 줄지어 있고,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노을이 인상깊었더랬다. 그 때 나에게 광주는 사연있는 도시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지금의 광주도 그랬다. 남도의 정취가 느껴지면서도 도시가 무언가 말을 걸고 있는 것 같았다.

순천은 20살 때 이후로 마음에 남아있는 나의 핫 플레이스이다. 순천만의 경치는 봄이어도 가을이어도 겨울이어도 예뻤기에 언제 가도 어떤 모습일까 기대되고 설렜다.

갈대가 펼쳐져 있는 모습은 눈이 부셨다. 사르르 소리를 내며 바람결에 흔들리는 갈대를 보고 있음 나도 바람이 되어 저 위를 날아다니는 것만 같은 착각에 휩싸인다.

뭐니뭐니해도 압권은 전망대에서 보는 풍경이다. 위에서 바라보면 순천만은 말 그대로 천혜 자연의 모습을 담고 있다. 바다와 펄과 식생들이 어울러져 한 폭의 그림알 자아내니 말이다. 일몰이 워낙 유명하여 항상 전문 사진 기사들로 북적이는 곳이이도 하다.

나는 버스시간이 있어 일몰을 보진 않았다. 대신 전망대에서 엽서를 구입해 아빠에게 편지를 보냈다. 다음 순천만은 언제 올지 모르지만, 편지를 써서 오늘의 순천만을 기록하고 싶었다.

남도의 바람은 따뜻하다고,
그리고 앞으로도 따뜻할 것 같다고
그 느낌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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