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1

Dec 20 2011

늘 머릿속이 복닥복닥 고민이 많았던 스물 한 살 한창 사춘기를 겪던 시절, 어디든 가야겠다 하고 떠난 멜버른. 여행 순간순간 의식의 흐름에 입각한 여행기_ 라고 쓰지만 실은 여행과 무관한 별별 생각이 더 많은 일기 조각의 모음.

Central

오스트레일리아AU

Sydney Airport

오스트레일리아AU

그래 어쩌면, '공항이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
양 옆으로 늘어선 게이트들 사이로 쭉 뻗은 복도에 들어서는 순간 왠지 모를 아득한 기분이 느껴진다.
아. 함께 하는 사람도, 기다리는 사람도 없는,
오롯한 혼자만의 여행이다.

8:50 시드니 공항

탑승을 기다리면 왼쪽 창가로 고개를 돌리니 아빠이리라 생각되는 중년의 남자가 서투른 손길로 어린 딸의 얇은 원피스 어깨끈을 조절해주고 있다. 아아, 아빠가 된다는 것은.

9:00 시드니 공항

Sydney Airport

오스트레일리아AU

Melbourne Airport

오스트레일리아AU

계획 없음이 주는 설렘.
혼자임이 주는 묘한 안도감이 섞인 불안.
지금 내 마음속엔 불안과 안도와 설렘과 은근한 외로움 중 어느 것이 가장 클까.

14:30 플린더 스퀘어의 어느 카페

거대한 수제버거를 먹은지 두 시간 만에 배가 고프다. 숙소로 혼자 돌아오는 길이 유난히 외롭다.

외롭다.

사람은 결국 '아무도 없어서'가 아니라, '누군가 있어서' 더 외로운 거라고 잘난척 했지만, 막상 완벽히 혼자가 된 시간이 고단하게도 외롭다.

21:00 숙소

지금 당장 아무리 외로와도 달려갈 곳도, 불러내 만날 사람도 없다. 전화를 걸 사람이.. 있었던가..?
오롯이 나 혼자 견뎌내야 하는 시간이다.

22:00 숙소

DAY 2

Dec 21 2011

여행길에는 왠지 늘 "낡은 배낭을 메고"를 듣곤 했는데, 가사를 곱씹다 보니 '우리'잖아. 난 아닌데. 치

15:30 브런즈윅 거리

문득 어디쯤 걸어온 걸까
멋진 풍경도 이제는 지겨워
앞으로 가야 할 길이 참 멀구나
예전엔 미처 알지 못했던 것
물 한 모금이 달디달다

한참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이 길은 어딜까
잔뜩 짊어진 배낭은
왜 또 이렇게 무거워
자꾸 배는 고프고
다리는 후들후들 거리지만
그래도 즐겁다

우리는

🎼
낡은 배낭을 메고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찰리 채플린도 그랬잖아. 못견디겠던 것들도 멀리 떨어져서 보면 귀여워 보이기도 하고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고. 그래도 막상 또 그게 다시 내 현실이 되고 일상이 되면 여전히 고개 돌리고 싶어지는거지.

그래서 우리는 여행을 하는 걸까?
어쩌면 여행은 '필연'일지도 모른다.

16:00 브런즈윅의 어느 카페

아- 카페에 앉으니 영 일어날 줄을 모른다.
외롭다고 여기저기 땡깡 부리지 말고 털고 일어나 다시금 여행자가 되자!

16:10 브런즈윅의 어느 카페

대체, 해변으로 가지 말라는 계시인 마냥, 두 번이나 타고 있던 트램에서 내려야 했고 (각기 열차 고장과 루트 변경을 이유로) 시내에서 20분이면 간다는 세인트 킬다 해변에 1시간 30분이나 걸려 도착했다.

18:00 세인트 킬다 해변

해변을 따라 혼자 걷고 걷다가 저물듯 말듯 뜨거운 태양을 하늘 한 켠에 두고 트램을 타러 다시 돌아왔다. 숙소로 가는 트램이 한 시간은 있어야 온다는 것을 깨닫고 방황하다가 결국 눈앞에 보이는 맥도날드에 들어왔다. 해가 지면 바닷가로 다시 나가려고 기다리고 있다.
혼자인게 싫으니 핸드폰에 매달리게 된다.

19:00 세인트 킬다 해변 맥도날드

좋아하다.
너가 좋다.
너와 함께 있는 게 좋다.
너가 나를 좋아하는 게 좋다.
너를 좋아하는 게 좋다.
혹은 '너'가 아니라 '누군가' 여도 크게 상관은 없을지도.

그건 다 다른 마음인데,
어떻게 '좋아한다' 하나로 묶어 가볍게 내뱉을 수 있지?

19:30 세인트 킬다 해변 맥도날드

여덟 시가 조금 넘어서 다시 해변으로 나간다.
해가 너무 예쁘게 지고 있어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나왔다.

20:00 세인트 킬다 해변

찰랑거리는 바다 위로 발을 흔들흔들 내리고 걸터앉아 해가 지는 하늘을 (혹은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본다. 작게 둘러 앉아 맥주를 마시며 마리화나를 피우는 프랑스 젊은이들 옆에 나란히 앉아, 거센 바닷바람에 코를 있는대로 울쩍 거리며 맥너겟 여섯 조각을 차례로 한입씩 야금 베어 물고선,

나- 를 생각한다.

음악이 있으면 좋겠다고 잠시 생각했다.
음악이 없어서 좋다고 또 생각했다.
지금 내 가능한 범위 내에서 바다와 가장 가까운 곳에 걸터 앉아
내가, 지금, 여기에,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

20:30 세인트 킬다 해변

그렇게 앉아있던 시간엔 없던 뜨거운 뭔가가 속으로부터 있는 힘껏 치받쳐 오른다.
아주 잠깐, 하지만 강렬하게,
코끝과 눈가에까지 가득 차오른 뒤 금새 사라진다.

여행 둘째날의 가장 짧고도 완벽한 순간.

21:20
채플스트리트를 지나는 79번 트램 안

하지만 그러면서도 지금 나는,
억지로 말을 다듬고 골라내고 있다는 것을 자각한다.
'억지로 말을 다듬고 골라내고 있다'고 쓰는 순간마저도 말을 다듬고 골라낸다. 나의 가장 한심한 점이라고 생각해.

21:30
채플 스트리트를 지나는 79번 트램 안

DAY 3

Dec 22 2011

인생은 여행과 달라서
계획없음이 마냥 설렘을 가져다줄 수는 없다.

어젯밤 찔린 가시들에 독이 없기를.

오늘은,
나만 생각할 것.

07:30 플린더스 스트리트 역

"아무도 나를 진심으로 정말 좋아해준 사람은 없었어"
그런 한심한 투정을 했을 때 언니는 내게
"너도 누군가를 진심으로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은 아니고?"
라고 되물었다.

누군가 나를 정말로 좋아해준 적도
내가 누군가를 정말로 좋아한 적도 없다.
나는 특별히 좋아하는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없고
무언가를 절실히 갖고 싶었던 적조차 없다.

정말로 불행해본 적이 없는 대신 정말로 행복해본 적도 없다.
그게 늘 나의 큰 컴플렉스라고 말하면서 실은 은근한 만족감마저 느꼈던 지도 모르겠다. 모순 덩어리.

10:00 그레이트 오션 로드를 향하는 버스

행복이나 불행이라고 이름 붙이는 물질적, 감정적 경험이 없이는 내가 하는 생각과 말들이 모두 부질없어지는 것은 아닐까. 아무것도 '진짜'일 수 없는 것은 아닐까. 내가 내뱉은 생각들 중 '진짜 온전한 나의 것'은 얼마나 되나. 이대로라면 그 무엇도 할 수 없다_는 기분.

하지만 그렇다면,
정말로 불행했던 사람에게 나는 무슨 말을 할 수 있지?
이런 고민들마저 어쩌면 한낱 위선에 불과한 지도 모른다.

11:00 그레이트 오션 로드

행복한 사람을 잘 믿지 않는다.
자신에 대한 회의가 좀 필요한 사람들은 막상 스스로에게 만족한 채 당당해하며 적당히 잘도 사는데, 늘 회의감에 괴롭게 힘든 사람은 지금 그대로도 좋은 사람들이다. 나는 그런 이들의 회의가 너무 마음이 아파. 회의가 냉소로 금새 변해버릴까봐. 자신의 냉소에 그 자신이 상처 받을까봐.
하지만 그렇게 안아주고 싶은 사람이 도대체 내 주위에는 몇이나 될까.

11:30 그레이트 오션 로드

너무 많은 것을, 아니 너무 중요한 것을 가져보지도 못한 채 잃어버렸다는 생각이다. 시간이 지나서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반짝이는 것들을, 적어도 한 번쯤은 소중하게 간직했어야 했다. 살아가는 동안 영원히 그 자리는 텅 빈 채로 시릴건데.

12:30 그레이트 오션 로드 위 카페

그레이트 오션 로드 투어 버스에서 한 일본인을 만났다. 중년의 남자는 지난 3월 쓰나미로 아내를 잃었다고 했다. 그는 그런 상처와 기억들을 떨치고자 여행을 왔다고 했다.
그 얘기를 듣고 나는 정말로 그에게 미안한 기분이 되었고,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아직도 숱한 사람들이 그 때의 사고로 고통받고 있는데, 나는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너무도 쉽게 잊은 채 살고 있다. 이건 그냥 과거의 지난 일이 아닌데. 어쩌면 나와 관계 없는 일이고 어쩌면 관련 없는 사람들의 일이지만, 그런 재난을 겪은 사람들에 대해 나에게도 어떤 책임이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는다. 그들이 단지 '타인'에 불과하지 않다는 것을. (아, 그가 꼭 다시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15:00 그레이트 오션 로드

'호감'과 '호기심' 사이.
그냥 호감도 성에 안 차는데 자꾸 호기심들로 떠보고 그러면 나는 어떡해.

22:10 사우스 야라 숙소

DAY 4

Dec 23 2011

나는 참 관광에 적합한 여행자는 아니다. (일단 게으르고 체력이 달려) 그치만 뭐 어때?

새로운 곳에서의 지속되는 일상.

특별히 무언가를 보고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낯선 동네에서의 여유가 나는 좋기만 하다. 늘, 유명하다는 무언가는 빼먹고 돌아오지만 나름대로 즐거운 내멋대로 남의 동네 구경.

11:00 사우스 야라 초콜렛 전문점

"여행지를 정할 때 가장 중요시하는 게 뭔가요?"
라는 질문에 모두가 특정 관광 명소나 분위기, 음식, 역사 등을 이야기했고, 그 중에서 나는 "내가 그 곳에 가고 싶은가" 라고 대답한 이름 모를 누군가에게 사랑에 빠질 뻔했다.

11:20 프라한

"Libraries are not made. They grow."

막힘없이 시원하게 달리는 멜번 공항 행 버스 안에서, 아이팟 재생목록을 무작위로 듣다가 너무나 익숙한 멜로디와 함께 튀어나온 팝콘. 나도 모르게 혼자서 푸- 하고 웃음이 터져나왔다. 작년을 거슬러 봄으로 스쳐 올라가며 뜨거웠던 5월 뷰티풀 민트 라이프를 지나 맨 바닥에 앉아 귓속까지 뜨겁게 두근두근했던 4월 말에까지 기억이 가닿은 순간,
심장이 터질 것 같아, 눈물을 쏟을 것 같아 ? :-)

15:00 멜번 공항 행 스카이 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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