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 후, 친척들이 모인 자리에서 엄마가 여행을 제안했다. 내가 회사에 들어가기 전, 시간이 있을 때, 여자들끼리 짧은 해외여행을 다녀오자고.
나는 여행사 상품으로 가지 않는 조건으로 동의했다. 대신 내가 스케줄을 짤 자신은 있었다.

그렇게 해서 시작된 큰고모, 작은고모, 엄마와 나, 조금은 특이한 조합의 네 명이 함께한 여행.

언제나 설레는 여행지 선택 단계에서 나는 머릿속 위시리스트를 꼼꼼히 살펴보았고, 터키, 프라하, 그리스 등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도시들을 떠올렸다. 하지만 현실과 부딪히니 계속 타협해야 하는 부분이 생겼다.

길게 시간을 내지 못하는 엄마, 힘들고 지저분한 동남아는 싫다는 고모, 뻔한 관광지를 돌아다니는 여행은 싫어하는 나.
내 욕심만으로 여행지를 강요할 수 없었기에 엄마에게 원하는 곳을 물어보니 중국을 유난히 가고싶어하시는 것 같다. 영화 아바타 촬영지로 유명한 장가계라는 곳이 있는데, 그렇게 멋있단다.
내 여행비도 엄마가 내주는 것이었기 때문에 선택권이 없었다.

그렇게 중국어도 안 통하고 자유여행으로는 가기도 힘든 장가계를 끝내 여행사를 통해 가게 되었다.

첫날부터 우려했던 스파르타 스케줄은 시작되었다.

밤늦게 장사 공항에 도착한 후 숙소까지 한시간, 호텔에 도착하니 자정을 넘긴 시간이었는데, 다음날 장가계 시로 이동해야 한다며 여섯시까지 나오란다.
게다가 중국 사람들은 실내에서도 담배를 핀다며 호텔방에서 이전 손님이 핀 담배냄새가 나도 참아야 한다.

에휴 여행사가 그럼 그렇지 하며 피로를 풀려는데 희미한 담배냄새에 깊은 잠에 들 수는 없었다.

다음날 천문산에 오를 때까지도 이 여행이 만족스럽지 않았다. 땅 아래가 안 보이는 오금 저리는 높이의 곤돌라를 타고 삼십분을 올라갈때도, 천문산에 올라 어마어마한 크기의 기암괴석으로 이뤄진 산 아래를 내려다볼때도, 그것들은 그냥 뻔한 관광코스의 하나였고, "멋있네" 정도의 감탄사로 기억남는 곳이었다.

나의 기억은 둘째날부터 시작된다.
대협곡 아래 계곡을 따라 걷는 트레킹코스. 1년에 3분의 2 이상은 비와 함께 한다는 습하디습한 이 곳에서 우리도 비를 피할 순 없었다. 소중한 카메라를 보호하느라 비옷과 우산을 동시에 쓰고 비닐봉지로 둘둘말아 감싸며 빠른 가이드의 걸음을 쫓아가느라 정신이 없었다.

하지만 그 사이로 보이는 풍경은 정말 잊을 수 없다. 정말 아바타에 나올 것 같은 특이하게 생긴 파란 잠자리들, 뿌옇고 푸른 물과 습기로 가득한 우림. 크기가 가늠도 안되는 돌산보다 그 속에 들어가 바라본 속살은 신비로웠다.

물결 하나 일지 않는 고요한 물 위에 중간중간 놓여있는 유람선은 풍경과 완벽하게 어우러져 있었다.

경치에 반해 정신없이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있자면, 우리 일행은 저만치 앞서 걷고 있다. 엄마가 걸음을 늦추고 사진찍는 나를 조용히 기다려준다.

사진은 찍어야겠고, 나 때문에 일행들이 기다린다면 민폐를 끼치는 것 같고, 한 숨도 쉬지않고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는 가이드가 원망스러웠다.
허나 어쩌겠는가, 알고도 선택한 여행사 상품인것을.

여행사로 가는 여행의 치명적인 단점은 다녀오면 지명이 기억에 남지 않는다는 것. 아무리 인상깊었어도 그냥 버스로 우리를 내려놓고 돌아보고, 또 다른 곳에 내려놓고 돌아보고, 같은 패턴의 반복이라 여행의 일부가 되는 가는 길에 대한 추억도 없다.
하지만 습기로 가득찬 뿌연 공기와 전통양식의 건물 등 장가계에 대한 강렬한 인상만은 잊을 수가 없다.
셋째날 갔던 곳은 바로 아바타 섬의 모티브가 되었다는 곳인데, 오늘은 운이 좋지 않은지 안개가 잔뜩 껴서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하루에도 수십번씩 시야가 좋아졌다 나빠졌다 한단다. 조금만 기다리자며 앉아있는데 안개가 살짝 걷히고 돌산의 모습이 드러난다. 여기저기서 감탄의 소리가 들리고, 너도나도 사진을 찍기에 바쁘다.

사실 가장 인상깊었던 곳은 원가계 올라가는 길. 나무와 중국식 건물들에 안개가 가미되어 중국 영화에서나 볼 법한 분위기가 연출된다. 정말 비는 계속 내리고 하루종일 너무 습했지만, 그 광경을 보고 불평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심지어 조금 높이 올라가니 원숭이마저 자유롭게 돌아다니니 그제서야 중국에 왔다는게 실감이 난다.

여행사 상품의 뻔한 관광코스 여행에 대한 걱정은 멋진 풍경이 완화시켜 준다. 이쯤되니 정말 여행을 왔구나 하는 기분이 든다.

호수 유람선과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동굴까지 모두 다녀온 후 남은 건 사진뿐이었다.

난 진짜 중국을 맛보지도 않았고, 진짜 중국에서 잠들지 않았고, 진짜 중국과 이야기해보지도 않았다. 가이드를 쫓아가느라, 여행사에 연계된 쇼핑몰에서 쓸데없는 설명을 듣는데 시간을 낭비하느라 화도 나고 지루하고 실망스러웠지만, 명목은 가족여행인데 여유롭게 대화를 나눌 시간조차 갖지 못했지만, 그런 여행이라도 분명 남는 것은 있다.

중국을 정말 스치듯이 여행하며 느낀 것은, 내가 중국에 대해 너무 많은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 공해천국, 예의도 매너도 없는 사람들, 맛없는 음식, 남들이 이야기하는 안 좋은 얘기들을 가지고 중국을 정의해버렸던 것은 아닐까.

다음번엔 '진짜' 중국을 가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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